金鎭浩
1873-10-20 ~ 1960-09-29·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진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김진호는 1907년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여 경상도 대표로 활동하였다. 또한 1908년 이후 상동교회 청년학원 역사교원을 지내다가, 상동교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경성지방회의 전도사로 옮겨갔다. 비밀결사 신민회는 조직의 보안을 위해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1911년 일제에 의해 신민회 조직이 파괴당할 때에도 상당수의 인사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그리고 1916년 4월 배재학교 성서교원으로 활동하면서, 1919년 2월 28일 정동(貞洞)의 이필주(李弼柱) 목사 방에서 그에게 대한독립선언의 취지를 듣고,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1일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러시아영사관·미국영사관·프랑스영사관으로 보내기 위해 봉투에 넣고, 정오 경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장용하(張龍河)로 하여금 중국 영사관에 이를 전달케 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경 같은 학교 학생인 오흥순(吳興順)에게 러시아영사관에 선언서를 전달케 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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