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根
1902-01-26 ~ 1938-05-16·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창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서울 신교동(新橋洞) 사람이다.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악대원이 되었으며 1922년 조선예술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5년 만주에서 동단을 탈퇴하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3·1공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다가, 1926년 1월 나창헌(羅昌憲) 등이 조직한 병인의용대에 가입하였다. 상해(上海)에서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 가입한 뒤, 상해에 있는 공산당 청년동맹을 해산시키고 1926년 9월에는 상해의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5년 11월에는 김구(金九) 암살의 지령을 받고 파견된 밀정 이태서(李泰瑞)를 사살하는 등 많은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자를 끈질기게 쫓는 상해 일본 총영사관 등정경부보(藤井警部補) 집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으로 실패하였다. 1936년 1월 군자금을 모집하고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鍾均) 등이 조직한 맹혈단(猛血團)에 가입하여 맹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연극 단원이 되어 만주(滿洲) 및 중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항일정신을 함양시키기도 하였다. 1936년 맹혈단(猛血團)에 가입한 뒤에는 단장인 오면직(吳冕稙) 등 10여 명과 함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기 위하여 활동하던 중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7년 4월 16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 복심법원을 거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3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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