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泰淵
1894-08-18 ~ (1968-12)·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泰鉉, 淵泰, 晋守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태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그는 고향에서 농전학교(農典學校)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 때문에 일경의 추적이 급박해지자 남만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무장단체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1922년에는 통군부(統軍府)의 뒤를 이어 통의부(統義府)가 성립되었으며, 그는 강수영(姜壽永)·이만성(李萬聲)·정창화(鄭昌華) 등과 함께 검무원으로 활약하였다. 통군부 성립이전인 1921년 9월에 미국에서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가 열리게 되니 "조선이 일제의 식민주의 통치에 결사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열렬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세계여론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는 당시 재만(在滿)독립운동자들의 의사를 대표해서 그는 스스로 결사대장이 되어 11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변에 이르러 소금배를 타고 도강, 삭주군 대관(大館)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대원 6명은 후속부대로 시내에 잠복시켜 놓고 대원 5명을 거느린 후 선두에서 지휘, 대관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1명을 사살하고 수명을 부상시켰으며 장총 7정, 군도 1개를 노획하고 수류탄을 던져 건물을 폭파 소각하였다. 이어 1922년 음력 7월 5일에는 당시 재만 무장독립운동단체의 고위 간부이던 오동진(吳東振)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제2차 국내진입을 하였다. 그는 대원을 인솔하고 재차 압록강을 건너 60여리를 걸어서 의주(義州)에 도착, 영산(永山)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과 치열한 교전 끝에 일경 3명을 사살하고 장총 4정과 군도 9개를 노획해 가지고 무사히 귀영함으로써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남만주 한족통일회(韓族統一會) 검무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에는 북만으로 이전하여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고 전과 같이 열렬한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1936년 음력 3월 8일 목란현(穆蘭縣)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의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39년 6월 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위반(制令違反) 살인·강도·방화 등의 죄목으로 15년 징역형이 확정되어 마포(麻浦)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과 더불어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68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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