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泰烈
(1879)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태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14일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 시장, 헌병주재소에서 한영태(韓永泰) 등이 주도한 3.1운동에 참여했다. 3월 14일 오후 4시경 신남면 고토리 시장에서 신상리(新上里)의 김태열은 신흥리(新興里)・신중리(新中里)・만풍리(萬豐里) 등 7개 마을의 주민 약 200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중흥리(中興里) 한영태・한면각(韓冕珏)・윤복민(尹福民) 등 60대 인사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신하리(新下里) 이익현(李益鉉)은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군중에게 참가를 독려했다. 이어 한계유(韓啓維)・조희창(曺喜昌)・한창순(韓昌順) 등이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20여 명의 군중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고토리헌병주재소에 이르렀다. 일부 군중은 함흥–장진 간의 전화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차단하고, 유치 중인 노석규(盧錫奎)의 석방을 요구했다. 주재소 구내에 들어간 군중은 돌, 막대기 등을 가지고 사무실과 숙소를 파괴하고, 서류와 물품 등을 밖으로 내던져 불태웠다. 또한 주재소장을 포박하고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 김태열은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파괴하거나 서류 등을 가지고 나와 불태웠다. 그러나 시위 군중을 제지하고자 주재소 헌병들이 발포하여 한규문(韓奎文) 등이 순국하고, 증파된 하갈우리(下碣隅里) 헌병들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태열은 만세운동 참가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1일 장진헌병분대에 구류되었다. 같은 해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에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칙령(勅令) 제120호에 의해 징역 8월 7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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