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漢弼
1914-08-20 ~ 1949-03-1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한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3년 3월 제주공립농학교(濟州公立農學校)를 졸업한 후 무안군 농회의 임시 지도원으로 근무했다. 1937년 7월부터 정식으로 지도원이 되었다. 1933년 11월경부터 김칠성(金七星)이 중심이 된 사회과학연구회에 참여하여 강좌회(講座會) 등을 통해 교양을 받았다. 이 사회과학연구회는 4월 10일경 무안군 지도면(智島面) 내양리(內楊里)의 내양학원(內楊學院)에서 김칠성과 황성연(黃成淵)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사회과학연구회는 1933년 11월 10일부터 1934년 3월 10일까지 5회에 걸쳐 지도면 내양리 옥녀봉(玉女峰)의 광장 또는 내양학원 등에서 사회과학 강좌회를 개최했다. 김한필은 여기에 참여했다. 이후 김한필은 사회과학연구회에서 김칠성 등이 작성한 원고나 격문을 필사(筆寫)해 정서(淨書)하고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4년 7~8월 사이에 김칠성이 작성한 「농민」이라는 문서를 정서했다. 그 내용은 “민심작흥(民心作興)에 의한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기만책(欺瞞策)을 폭로한다”는 등 일제의 허구적인 농촌정책을 비판하고 경제적으로 파탄해가는 무산 노동자·농민의 실상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8월 1일 일제의 침략전쟁을 절대 반대하는 내용으로 된 「반전(反戰) 뉴스」라는 제목의 삐라도 원지(原紙)에 정서하고, 김칠성과 함께 이를 등사판(謄寫版)으로 등사 인쇄하였다. 그리고 김칠성은 직접 이를 황성연 등에게 배포하였다. 1934년 9월 15일 김칠성·황성연·나필환(羅弼煥) 등의 지도부는 사회과학연구회라는 학구적 성격의 단체를 넘어서 실천운동을 지도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20일 내양리 김칠성의 집에서 ‘전위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김칠성이 책임자가 되었다. 21일경 김칠성으로부터 전위동맹의 강령·규약·운동방침 등의 정서와 보관을 의뢰받은 김한필은 이를 실행하였다. 전위동맹에서는 같은 해 10월 10일부터 1935년 1월 10일까지 4회에 걸쳐 사회과학 강좌회를 개최하였다. 김한필은 김정국(金正局) 등과 함께 여기에 참가하여 교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김한필은 농회 지도원이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 신분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이러한 전위동맹의 존재와 활동이 1937년 11월 초 목포경찰서(木浦警察署)에 탐지되었다. 같은 달 13일 이래 전라남도경찰부 고등과의 지휘 아래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김한필도 체포되었다. 10개월만인 1938년 8월 18일 임귀석(林貴錫) 등 58명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 29일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이 사이 1938년 1월 19일 부로 농회 지도원을 사임하였다. 검거된 지 2년 4개월이나 지난 1940년 2월 29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3월 4일 친동생인 김한용(金漢龍) 등과 함께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8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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