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弘基
(187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홍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7~1908년 강원도, 충청도 일대에서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과 채정문의진(蔡正文義陣)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정미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홍기는 이강년의진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풍기(金豊基) 등과 참여하여 각지에서 군수물자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음력 10월 15일경 총기와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제천군(堤川郡) 북면(北面) 일곡리(日谷里)에 거주하는 지병언(智秉彦)에게서 군자금 15원과 짚신을 모집하였다. 10월 27일에는 의병장 윤 모의 휘하에 들어가 11월 중 의병 5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횡성군 부라오리(夫羅吾里)에서 소 2마리를 모집하였다. 음력 11월에는 강릉군(江陵郡) 본수리(本手里) 민가에 들어가 당목(唐木) 3필을 모집하였다. 1908년 음력 4월 채정문(蔡正文)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 30여 명과 원주(原州), 영춘(永春)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달 12일경 일본군 단양수비대(丹陽守備隊)의 공격을 받고 적의 총탄에 왼쪽 무릎 관통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1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 및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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