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弘敍
1886-02-03 ~ 1959-10-2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弘叙, 金志剛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홍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함종(咸從)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월 비밀리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의 전국 연락원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하다가 소위 105인사건 이후 은신해 있었다. 1915년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초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하순에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이동녕(李東寧) 등 68명의 의원과 같이 참석하여 국무원 비서장 조소앙(趙素昻)·내무차장 신익희(申翼熙) 등의 사직원 수리와 차장제 폐지 및 위원제 사용을 결의하였다. 동년 7월 하순에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상임위원회 군무위원(軍務委員)으로 선임되었다. 이때 군무위원장은 이희경(李喜儆)이었고 이사는 김 갑(金甲)이었다. 이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같은 해 7월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의 주재하에 임시정부 사료편찬회(史料編纂會)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감사로 선임되었고 총재는 안창호, 주임은 이광수(李光洙), 위원은 김병조(金秉祚) 등 9명이며 조역은 김붕준(金朋濬) 등 20명이었다. 여기서는 한일관계사료 등 여러 가지 민족의식에 관련된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대외적으로 홍보하였다.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와 「한일관계사료집」4권은 국제연맹에까지 보내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집으로 손꼽힌다. 이는 임시 사료편찬회가 편 가장 중요한 독립사업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이런 류의 서적이나 기타 주체적인 간행물은 해외 홍보용으로 크게 주목을 받아 우리의 처지를 십분 이해시킴에 기여하였다. 역시 같은 해에 그는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常議員)과 상해교민단장(上海僑民團長)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지원과 한국동포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조직하고 그 구제위원장(救濟委員長)으로도 활동하였다. 1920년 2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參事)와 동년 7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의사원(議事員)이 되기도 하였다. 1920년 12월 「조선에 있어서 일본군의 참해」라는 한문 등사문을 작성, 각 방면에 배포하여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안창호 등 수십 명과 같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그 회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침체를 탈피하게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는데 그는 김 구·여운형 등 20여 명과 같이 기초위원이 되어 군인양성 및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을 위해 심신을 경주하였다. 같은 해 한·중 양국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문서과 주임으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6월에는 공성단(共成團) 대표로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의정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안창호·이동녕·김 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3년 초에는 상해에서 흥사단 원동대회(興士團遠東大會)에 참여하여 제2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자금 조달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교민단 정무위원장에 뽑혀 세금 징수 등 임시정부 지원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1937년 1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8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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