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炳三
(1893) ~ 1922-08-28·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나병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덕천(德川) 사람이다. 1921년 2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大韓獨立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하여 모험부(冒險部)의 부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는 조맹선(趙孟善)이 사령장(司令長)으로 있는 대한독립광복군(大韓獨立光復軍) 사령부(司令部)의 산하 청년조직으로서 국내의 청년단체들을 통할한 조직이었으며, 특히 평안도 일대에 조직이 발달하였다. 그는 1921년 2월 이후 이원보(李元輔) 등과 함께 덕천군 일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660원의 군자금을 동단의 평안남도 총무인 김봉규(金琫奎)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동년 2월 초 이운서(李雲瑞)의 집에서 나신택(羅信澤)·예낙원(芮樂園)·김병훈(金秉薰)·이원보 등과 함께 독립 달성을 위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무기탈취·친일부호의 처단·군자금 모집 등을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제의 우편차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21년 3월 20일 덕천우편국에서 영원 우편국으로 이송하는 우편차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덕천군 풍덕면(豊德面) 신흥리(新興里) 대현(大峴)에서 기다리다가 우편차를 호위 중인 영원(寧遠) 경찰서 순사 박의창(朴義昌)을 처단하고 공금 5,000원과 권총 1정(挺)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일제 기관을 파괴하기 위하여 각종 폭발물을 제작하는 한편 맹산군(孟山郡) 선유봉(仙遊峯) 중턱의 호굴(虎窟)을 근거지로 삼아 1만 2천자의 활자와 3대의 인쇄기를 설치하고 각종 격문과 선전물을 인쇄하여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21년 6월 일제에 붙잡혀 1921년 11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死刑)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3월 2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동년 7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 형이 확정되어 1922년 8월 28일 평양감옥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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