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正龜
(1885)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나정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태천(泰川) 사람이다. 1915년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외 8명이 조직한 조선군단에서 경영하는 군사교육기관인 사관학교에서 사무를 보았다. 3·1운동 당시에는 흥경현(興京縣)에서 대한청년단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에 중국 안동현(安東縣) 구시가(舊市街) 풍순전(豊順錢)에서 국내에서 활약하던 학생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박영우(朴永祐) 등이 만주로 피신하여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를 보면 총재에 안병찬(安秉瓚), 단장 함석은, 서기 장자일(張子一), 간사 박영우 등이며, 주요 구성원은 20대 청년들이고, 근대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하였으며, 출신지는 대부분이 평북지방이다. 대한독립청년단은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간행하여 임시정부의 입장을 널리 선전하였다. 나정구는 대한청년단에서 김기선(金基善)·탁 공(卓公)·강연수(康連洙) 등과 함께 안동현 소만류구(小萬留溝)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호세(戶稅) 징수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호세 99원과 동현(同縣) 전창(田倉) 지방에서 모집한 돈 1백 원을 송금하고, 동년 12월경 평북 창성(昌城)에서 금 1백 원을 모집하여 보내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0년 7월에는 만주 해룡(海龍)·통화(通化)·흥경·무순(撫順) 등지에서 독립단원으로서 동지 조대능(趙大能)·문창현(文昌賢)·김용보(金鎔甫)·전일록(全日祿)·권덕근(權德根)·김명봉(金鳴鳳) 등과 함께 일제의 주구기관인 보민회(保民會)를 토벌하여 독립단의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1924년 3월 봉천성(奉天省) 흥경현에 본부를 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1922년 8월 30일 남만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군부(統軍府) 대표 등 71명이 참석하여 조직한 것으로, 당시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재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나정구는 대한통의부 제2중대 제3소대 참사(參士)가 되어 동년 6월 하순에 소대장 손시형(孫始亨) 외 6명과 함께 근거지를 떠나 8월 8일 오후 8시경 평북 구성군(龜城郡) 관서면(館西面) 조악동(造岳洞)에서 최창학(崔昌學)이 경영하는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습격하여 순사 김용정(金鎔楨)을 총살하고, 동리(同里)에서 군중들을 모아 놓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1백 원과 금 6량 8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20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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