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曰星
1909-07-02 ~ (1956-10-20)·일제강점기
이명·자·호 남광풍(南光豊), 남용식(南容植)
1927년 강원도 울진군의 울진청년회(蔚珍靑年會)에 가입했다. 12월 23일 신간회(新幹會) 울진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재정부 간사를 맡았다. 1929년 8월 이우정(李愚貞) 등과 함께 울진청년회를 군 단위 단일 청년조직인 울진청년동맹(蔚珍靑年同盟)으로 재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7월 15일 울진읍(蔚珍邑) 연지리(蓮池里) 연호정(蓮湖亭)에서 이우정 등과 함께 비밀결사 울진공작당(蔚珍工作黨)을 창립했다. 8월 15일 제2차 총회를 열고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했으며, 9월 15일 제3차 총회에서는 조직명을 극동공산주의자동맹(極東共産主義者同盟)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했다.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고자 극동공산주의자동맹의 상부기관인 공작위원회(工作委員會)를 만들었다. 이때 남왈성은 양양(襄陽) 등지로 가서 정세를 시찰하고 각 지구 책임자들을 격려 지도하라는 명을 받고 수행했다. 12월 10일 제4차 총회를 끝으로 조직은 해체되었다. 1932년 11월 진기열(陳基烈) 등과 함께 울진적색농민조합(蔚珍赤色農民組合) 명의의 선언문을 만들었다. 1933년 3월 29일 울진군 북면(北面) 덕구리(德邱里)의 온전여관에서 비밀결사 울진적색농민조합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때 각 부서를 정했는데 남왈성은 조직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조직선전부 책임자로서 9월 20일경부터 그 하부조직으로 울진면(蔚珍面) 평정리(平井里)에 야학(夜學)을 운영했다. 12월 함경남도(咸鏡南道) 함흥부(咸興府)에서 비밀결사 함흥동지회(咸興同志會)를 조직했다. 1934년 8월경 ‘울진적색농민조합 사건’으로 100여 명이 검거될 때 체포되었다. 12월 6일에 17명의 동지들과 함께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재판장에 선 그는 1935년 7월 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와 함흥형무소(咸興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1월 30일 출옥했다. 회사 사무원으로 일하던 1943년 무렵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또 다시 체포되었다. 12월 18일 기소중지(起訴中止)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9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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