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仁相
(1868) ~ 1951-05-02·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南性佑, 南仁祥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남인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남 안변(安邊) 사람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기독교 장로로 1905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1910년 연길현(延吉縣) 와룡동(臥龍洞)에 민족학교인 창동학교(昌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간도지역에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용정(龍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날 독립축하회가 끝나자 명동학교 학생 충렬대가 앞장서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가운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남인상은 연길현 용정(龍井)에서 재남북만주 조선민족대표(在南北滿洲 朝鮮民族代表) 17인 중 1인으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을 발표하는 한편 3·13 시위운동 시 김약연(金躍淵)·구춘선(具春先)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구춘선을 중심으로 조직된 북간도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성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행정부·군사조직 등에 당시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이념적으로는 공화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회의 성격이 자치기구이지만 무장활동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금의 모집, 독립군의 양성 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장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남인상은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시에는 각처로 피신하며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후 광복시까지 기독교 장로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광복후에는 기독교 대표로 연변(延邊) 제1차 임시참의원(臨時參議員)을 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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