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且甲
1904-11-27 ~ 1967-01-08·현대
이명·자·호 盧且用, 盧在原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노차갑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남 창녕(昌寧) 사람이다. 1928년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와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의 회원으로 활약하던 중 보다 혁명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비밀결사 ㄱ당을 조직하였다. 신간회와 대구청년동맹과 같이 일제의 허가를 받은 등록단체(합법단체)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낀 그는 1928년 2월 신간회와 대구청년동맹을 탈퇴하고, 소수 정예의 결사적 투사들의 결집체인 비밀결사를 만들고자 1928년 5월 문상직(文相直)·정태봉(鄭太鳳) 등 5명과 함께 달성공원에 모여 ㄱ당(黨)을 창립하였다. 이들이 조직의 명칭을 ㄱ당이라 정한 것은 'ㄱ이 한글의 처음 글자로 조선의 기원(起源)을 의미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었다. ㄱ당은 조직부와 재정부·조사연구부 등을 두었는데, 그는 재정부의 일을 맡았다. 이 때 이들의 활동 목표는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에서 농경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농민을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적당한 인물을 발굴하여 중국 광동(廣東)에 설치된 군사학교에 파견, 정규 과정을 이수케 함으로써 무력양성의 계획도 구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이들은 군자금 수합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노차갑은 곽동영과 함께 1928년 6월 11일 신호용 권총을 휴대하고 달성의 부호 김교식을 상대로 5천여 원의 군자금을 확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 일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히고 말았다. 그 후 그는 1928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29년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37년 동아일보 대판지사(大阪支社)를 운영하면서 조선인 단체 신문사를 창설하고 신문을 통하여 재일본 조선인의 정치적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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