都明洙
1879-06-19 ~ 1976-02-2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도명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도명수는 1909년 함남 홍원에서 강우규의 도움으로 상업에 성공, 홍원 덕흥상회(德興商會)를 운영하였다. 강우규는 65세의 나이로 1919년 9월 2일 새로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덕흥상회 원산지점을 점검차 들렀다가 강우규를 만나게 되었고, 강우규에게 거사 자금으로 500원을 주었다. 강우규 의사는 상경하여 거사하고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한편 그의 자금 조달을 알고 있던 덕흥상회 수석 점원 김모(金謀)의 밀고로 도명수 또한 홍원경찰서에 잡혀 가서 호된 고문과 문초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도왔던 은인(강우규)이 서울 구경을 가신다기에 노자를 드렸다고 항변하여 며칠 후 풀려나왔다. 한편 1919년 음력 7월 경부터 함남 홍원에서 김신근(金信根)·정염구(鄭濂球)·한원칠(韓元七)·최대용(崔大鏞)·안억준(安檍俊)·김태균(金泰均) 등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露貨 2만 2천루블: 한화 27원)을 모집하여 북간도 국민회(國民會)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1921년 4월 15일 체포되었다. 도명수는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해 항소하였으나, 동년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정치범처벌령)’ 위반으로 8개월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22일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8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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