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達爕
(1881) ~ 1910-07-18·대한제국
이명·자·호 孟達成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맹달섭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1906년 민종식(閔宗植)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에 항거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하자 민종식은 상경하여 광무황제의 윤허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이용규(李容珪), 이세영(李世永) 등과 함께 충남 정산(定山)을 거점으로 하여 격문 및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청원서 작성, 군수품 준비 및 동지 규합에 나섰다.이와 같이 준비를 갖춘 후 민종식은 드디어 1906년 5월 충남 홍산(鴻山)에서 거의하였다. 의진이 행군하여 서천(舒川) 읍내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군사의 수가 1,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성대한 의세를 이룬 민종식의진은 서천과 남포에서 총포와 탄약을 접수하고 친일 군수를 감금하는 한편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하였다.민종식의진은 5월 19일 충남의 군사 요충지인 홍주성(洪州城)으로 진군하였다.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격파하고 성중으로 포화를 퍼부었다. 적군은 의병진의 공세에 밀려 일본 민간인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하여 예산으로 달아나고 의진은 홍주성을 점령함으로써 의세를 떨쳤다.홍주성에 입성한 후 진용을 새로이 정비한 의진은 군사를 6대로 나누어 홍주성의 방어를 철저히 하였다. 5월 20일 적의 총공격이 시작되어 일대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민종식의진은 적병 35명을 사로잡아 처형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이에 적병은 정예부대를 보강하여 5월 31일 폭약으로 동문을 부수고 성중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을사의병의 개전이래 유래가 없는 격전이 전개된 것이다. 적군과 의진의 양측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적이 정예부대임에 비하여 의진의 군사들은 훈련이 부족한 민병일 뿐 아니라 병력도 부족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주요병력 83명이 적군의 포로가 됨으로써 더 이상 홍주성을 사수할 수 없게 되었다. 민종식 의병장을 비롯한 의진의 핵심인사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홍주성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민종식 의병장은 재거의를 준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맹달섭은 이와 같은 민종식의진에 소속되어 홍주성 공방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홍주성에서 퇴각한 이후에도 충남 정산, 부여 및 경기도 죽산(竹山), 양성(陽城)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뿐 아니라 부여군아(扶餘郡衙)를 습격하여 죄수를 방면하고 충남 서산, 공주 등지를 넘나들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1910년까지 활동하였다.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격으로 1910년 체포되어 동년 5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 강도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7월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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