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達煥
1851-08-21 ~ 1938-03-0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문달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문달환의 본은 남평(南平)이며 전라남도 화순(和順)에 거주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있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淳昌)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井邑)·순창·곡성(谷城)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玉果)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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