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鍾禹
1889-11-03 ~ 1941-11-16·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문종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에 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연락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 일행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직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주살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는데, 제1대는 서울에, 제2대는 평양에,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방면으로 파견되었다.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박치의(朴致毅)를 비롯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선천경찰서의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는 제3대의 결사대원들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이 늦어진 때문에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에 결사대원들이 다시 모여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이학필과 함께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를 지원하였던 그를 비롯하여 20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까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그는 1921년 4월 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4일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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