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景雋
1894-07-19 ~ 1932-09-0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경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은율(殷栗)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의 장연(長連) 장날을 이용하여 유원식(柳元植)·임국승(林國承)·오윤화(吳允和)·최태영(崔泰永)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각 교회의 신도와 청년·학생들과 연락하여 시위계획을 세우고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두었다. 이때 김일영(金一泳) 등 10여명의 학생들도 비밀회의를 갖고 대한독립만세라는 문귀를 적은 태극기를 그려서, 장터·보통학교 정문 게시판 등에 붙여 시위분위기를 고취하였다. 3월 12일 장연장터에는, 장연면은 물론 일도면(一道面)·이도면(二道面)에서도 기독교인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행진 도중에 군중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부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을 미리 알고 대비하던 일본 경찰은, 인근 송화읍(松禾邑) 헌병대에 구원요청을 하여 시위대열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는 결국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었으며,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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