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桂壽
1906-01-17 ~ 1977-01-16·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계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박계수는 1906년 1월 17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면(新寧面) 화성동(花城洞)에서 태어났다. 1916년 4월 1일 신녕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1년 3월 24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규수(九州)지방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생활개선과 노동자 계몽 등에 앞장섰다. 1931년 4월 10일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에서 한국어 잡지 『노동독본(勞働讀本)』을 발행했으며, 이를 매월 10일 북구주(北九州) 일대에 배포했다. 『노동독본』은 재일 한국인 노동자들의 교양 교재로 활용되었다. 1932년 7월경 후쿠오카현 토바타시(戶畑市)에서 노동 청년 교육기관인 호전조선노동학원(戶畑朝鮮勞動學院)이 설립되었다. 호전조선노동학원은 교사(校舍)까지 건축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인 아동과 청년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박계수는 호전조선노동학원에서 강사를 맡았다. 11월 20일 호전구매저축조합(戶畑購買貯蓄組合)을 창립하여 한국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생활에 혜택을 주려했다. 1936년 6월 코쿠라(小倉) 시멘트 공장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회사측은 한국인 함바주[飯場主] 유경순(兪慶淳) 등을 통해 쟁의단을 설득작업을 벌였다. 함바주 등은 박계수를 통해 회사측과 쟁의단 간의 절충을 시도했다. 박계수의 노력으로 6월 17일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되었다. 1930년 중반 박계수는 전구주합동노동조합(全九州合同勞動組合)에서 상임서기를 맡았다. 한국인 노동자 권익 옹호와 노동쟁의 사업을 이끌었다. 1937년 1월 18일 기선(汽船) 적탄(積炭) 인부하청업(人夫下請業) 한국인 노동자 93명들에게 대우개선을 사업주에게 요구하도록 했다. 1월 19일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요구를 거부하자, 한국인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일본인 사측은 인부의 보충, 폭력단(暴力團)을 동원하여 파업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쟁의가 일어나자 후쿠오카현 당국은 파업을 선동하고 노동작업을 방해하였다는 명목으로 쟁의단원(爭議團員) 20명을 검거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9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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