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奎秉
1889-01-05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규병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현북면은 4월 7일과 9일에 독자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7일은 현북면 원일전리(元日田里)·장리(獐里)·도리(陶里)의 주민과 그곳 서당 학생 등 300여 명이 서면 용천리를 거쳐 양양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때 군중을 모으고 시위를 계획했던 사람은 원일전리의 박규병과 박용규(朴容圭) 그리고 장리에서 교사로 있던 이성윤(李聖允)이었다. 원래 4월 9일 양양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박원병(朴元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어 양양경찰서에 구금이 되었다. 이렇게 9일로 계획한 운동이 미리 발각되면서 부득이 4월 6일 원일전리 가마솥 제조장에서 40명의 군중에게 만세시위계획을 알렸다. 7일 아침 장동리현(獐洞里峴)에 집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양읍내로 쇄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 밤 자택에서 박용규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7일 아침 장동리현으로 가서 그 곳에 운집한 300여 명을 이끌고 양양읍내로 행진하던 중 임천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용천리에서 만난 경찰을 향해서는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박규병은 1919년 4월 7일 강원도 양양군에서 300여 명의 만세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9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의 판결 선고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7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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