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今奉
1894-01-01 ~ 1971-04-03·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吉田光助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금봉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강경면의 만세시위는 엄창섭(嚴昌燮)이 3월 5일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군(益山郡) 웅포면(熊浦面) 대붕암리(大鵬岩里)에서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 강금옥(姜今玉)으로부터 3.1만세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6, 7일경 박금봉이 교편을 잡고 있는 부여군(扶餘郡) 세도면(世道面)의 사립 창영학교(昌永學校)에서 고상준(高相俊)·추병갑(秋炳甲)과 함께 3월 10일 강경읍 장날에 만세 시위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9일 김종갑(金鍾甲)·추성배(秋聖培) 등의 협조를 받아 10일 아침까지 태극기 200개를 만들었다. 가마니에 넣은 태극기는 서삼종(徐三鍾)이 강경면 옥녀봉에 운반하였다. 오후 3시 박금봉·정기섭(鄭沂燮) 등은 옥녀봉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 모여든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도 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옥녀봉을 내려와 강경시장에 이르러 그 곳의 군중과 합세하여 가두행진을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박금봉은 1919년 3월 10일 논산군 강경면 시장에서 3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태형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