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吉陽
1896-10-13 ~ 1928-01-19·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길양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 강화(江華) 사람이다. 1921년 김환일(金還一)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경기도와 삼남(三南) 지방을 순회하며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동년 10월 31일 일경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한 그는 시대일보(時代日報) 강화지국장을 지내면서 강화청년회(江華靑年會)에 가입·활동하였다. 그는 1925년 4월 18일 박헌영(朴憲永)의 집에서 박헌영·권오설(權五卨)·주세죽(朱世竹)·김 찬(金燦)·홍증식(洪增植)·조봉암(曺奉岩)·김단야(金丹冶) 등 17명의 동지와 함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회원 양성을 위한 강습소의 설치를 계획하였으며 ≪조선지광(朝鮮之光)≫·≪신흥청년(新興靑年)≫ 등의 잡지를 인수하여 동회의 기관지로 발간코자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동년 11월말 신만청년회(新彎靑年會) 사건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예심이 진행되던 중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병을 얻어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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