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老英
1900-08-27 ~ 1945-08-17·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耆壽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노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북 부령(富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학생으로 광무황제의 인산일을 계기로 강기덕(康基德)·박쾌인(朴快仁)·김백평(金栢坪) 등과 함께 같은 학교 학생들을 규합하는 한편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 200여매를 인사동(仁寺洞)·낙원동(樂園洞)·관훈동(寬勳洞) 일대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3월 6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울에서의 제2차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한위건(韓偉健)이 쓴 선언문 800여매를 등사하여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3월 8일에서 10일까지 '동포여 일어나라'는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다음 해인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1년 3월 2일에는 함북도민 항일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경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2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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