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斗鍾
1904-09-28 ~ 1967-12-06·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두종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남 홍원(洪原) 사람이다. 기독청년회관 영어과에 재학중인 1926년 4월 융희황제의 별세 소식을 들은 그는 동년 5월 20일에 당시 죽첨정(竹添町)소재 그의 하숙방에서 각학교 학생대표 40여명과 모여 융희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이천진(李天鎭)·박하균(朴河鈞)·이병립(李炳立)·이선호(李先鎬) 등과 그 준비 책임을 맡았으며, 그는 박하균과 함께 운동자금의 염출을 맡았다. 동년 6월 5일에 준비책임자들은 산책을 가장하여 북아현동에 집결한 뒤 태극기 2백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여장을 만들었다. 또한 인쇄기를 빌어 사직동의 이석훈(李錫薰) 하숙방에서 수만장의 격문을 인쇄하였는데 그는 격문배부의 책임을 맡았다. 거사당일인 6월 10일에 그는 황금정(黃金町 : 지금의 을지로) 5정목에 있던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국장행렬을 봉송(奉送)하고 대여(大輿)가 통과한 직후에 준비해온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함과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그는 일경에 붙잡혀 곧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붙잡힌 후 그는 6·10만세운동 학생주동자 10여명과 함께 기소되어 1927년 4월 1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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