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文道
(1884)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문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8년 11월 전북 장수군(長水郡) 계북면(界北面)에서 유종환의진(兪宗煥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의병장 유종환은 1907년 9월 김동신(金東臣)과 함께 창의하였다. 김동신의진은 삼남의병도대장(三南義兵都大將) 김동신, 선봉장 김재성(金在性)ㆍ유종환ㆍ이병후(李炳厚), 좌익장 염준모(廉俊謨), 우익장 노원식(盧元植), 후군장 임병주(林秉柱), 수성장 정기중(鄭基中), 군량장 박헌태(朴憲泰)ㆍ임대형(林大亨), 모사 정범기(鄭範基), 서기 김동현(金東鉉) 등으로 구성되었다. 유종환은 1908년 2월 황간군(黃澗郡)에 사는 김진규(金辰奎)의 주선으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무주(茂朱)ㆍ안의(安義)ㆍ장수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김동신이 체포된 1908년 6월 이후에는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성범(全聖範)과 함께 용담(龍潭)ㆍ금산(錦山)ㆍ영동(永同)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경남 거창(居昌)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끝에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된 후 순국하였다. 박문도는 1908년 11월 유종환의진에 참여하여 동료 의병 약 27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장수군 계북면 매고리(每古里)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박윤명(朴允明)ㆍ박재근(朴在近)ㆍ최익삼(崔益三) 등과 함께 계북면에서 신전막(薪田幕)에 거주하는 김서홍(金瑞弘)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4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 및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09년 9월 2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칙령 제23호에 의해 징역 3년 6월로 감형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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