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文鎔
1900-06-29 ~ 1929-07-0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문용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박문용은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신천읍(信川邑)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천읍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7일, 신천읍 장날을 기하여 시작되었다. 계획은 기독교인 김영호(金永昊)·이용규(李容圭)·이창화(李昌華)·홍종준(洪鍾俊) 등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이튿날에도 읍내에서는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체포된 사람들의 수가 75여 명에 이르렀다. 심한 탄압과 감시하에서도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계속되더니 10일을 지나서 4월 6일 신천 장날에는 또 만세소리가 장터에서 일어났다. 읍내에서 상업을 하던 박문용은 고종환(高宗煥), 양제선(梁濟善), 양재원(梁在元) 등과 함께 4월 3일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태극기를 그리며 준비하였으며, 이날 장날을 기회로 하여 약 30명이 장터로 나가서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대에 의하여 구속되었다. 이튿날인 4월 7일에는 읍내를 위시하여 용문면(龍門面) 사창리(司倉里)·용진면 유천리·북부면(北部面) 석당리(石塘里) 등 각지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크게 벌어졌다. 용문면 사창리에서는 이치재(李致才)·권태응(權泰應)·방진성(方鎭星)·권영구(權寧龜)·권영봉(權寧鳳) 등이 헌병주재소 부근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고 헌병들과의 충돌이 생겨, 흥분한 군중들은 주재소의 유리창을 부쉈다. 4월 8일에는 가련면(加蓮面) 조우리(棗隅里) 헌병주재소에 약 400명의 민중들이 모여서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뒤이어 두라면(斗羅面) 원동리(院洞里)와 가산면(加山面) 간성리(干城里)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체포된 박문용은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 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7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3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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