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鳳來
1894-11-01 ~ 1980-10-17·현대
이명·자·호 朴麟出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봉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6일 양일동안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降峴面)·도천면(道川面)이 합동으로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들은 4월 5일 양면이 합동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각리에 책임자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거사 준비를 진행시켰다. 박봉래는 그가 구장으로 있던 강현면 회룡리(回龍里) 지역을 맡았으며,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거사계획을 알리는 한편, 몇몇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5일 10시 경, 강현면민은 물치 장터로 모였고, 도천면민은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로 모여들었다. 4월 5일 10시경, 강현면 군중 500여 명은 물치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시위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박봉래의 주도로 도천면으로 행진하여 갔다. 오후가 되자, 강현면·도천면 군중 천여 명은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대포리주재소로 몰려가 일경의 사죄를 받아내는 등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6일 양면의 시위군중 1,200∼1,300명은 다시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양양읍내로 행진하였다. 그런데 연창(連昌)에 다다랐을 때, 뜻하지 않게 일본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저지하는 군대를 뚫고 읍내로 들어가 경찰서로 몰려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경찰서장이 저자세로 나오자, 결국 시위군중들은 독립만세만 부르고 해산하였다. 후에 일경은 시위 가담자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3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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