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勝道
1897-02-18 ~ 1919-03-1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승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1919년 3월 11일의 은홍면 온정리(銀紅面溫井里) 장날을 이용하여, 박치간(朴致幹)·정계로(鄭啓老)·유용원(柳龍源)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전개된 3·1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치간·정계로·유용원과 함께 온정리 장날인 3월 11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매일 밤 학산리(鶴山里) 유용원의 집에 모여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하며, 은홍·대행(大杏)·서하(西河) 면내의 각 교회에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연락하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 온정리 교회내의 이정엽(李正燁)의 집에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모여, 선명학교(善明學校)교장 박치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모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이라고 쓴 선두의 큰 기를 따라 시가행진을 하였다. 그도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중, 헌병 주재소 앞을 지나가는데 일본 헌병 1명과 조선인 보조원 2명이 나와서 대한독립기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때 그는 위협하는 보조원의 총검을 빼앗아 그를 때려서 쓰려뜨렸다. 그러자 다른 보조원은 도망치고 겁에 질린 일본 헌병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그러나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헌병들이 대거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그는 전인식(全仁植)·김학규(金學圭)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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