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承浩
(1866) ~ 1922-08-04·대한제국
이명·자·호 朴承洗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승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천군 신부면의 원동교회 목사로 재직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전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암살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방면으로 파견되었으며,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박치의(朴致毅)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선천경찰서 등의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결사대원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으로 가서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투탄하였으나 불발하였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은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였던 그를 비롯하여 20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까지 속속 체포되었으며, 그는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평양형무소에서 신병으로 옥사 직전에 출옥하여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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