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榮奎
1924-04-26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영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남 영흥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고등공업학교(東京高等工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박영규는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한국인들이 사회적으로 압박과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1941년 7월 같은 하숙집에 있던 유학생들인 정명화(鄭命和), 장동선(張東鮮)과 그 부근 거주 조영진(趙英珍), 장세종(張世鐘), 강준섭(姜駿燮) 등에게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후 이들은 서로 민족적인 의기가 투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이 되어야만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인식하였다. 또한 박영규를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① 조선의 독립 없이는 조선민족의 행복은 없다는 것, ② 창씨제도와 한글의 폐지는 한국문화를 파괴한다는 것, ③ 한국역사의 우수한 점을 찬미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할 것, ④ 한국인은 체력과 두뇌 등이 일본인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 ⑤ 한국민중의 무지를 지도 계몽하여 민족적 자각을 촉구할 것, ⑥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를 통해 민중을 지도할 것, ⑦ 태평양전쟁 중 일본의 혼란 상태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므로 이러한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완수할 것 등의 주장을 하였다. 박영규 등의 동경 유학생들은 이같은 주장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항일적인 활동을 하다가 1942년 2월 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7월 1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후 1942년 11월 30일 박영규와 그의 동지인 장세종, 장동선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을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8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