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英達
1916-12-13 ~ 미상·현대
이명·자·호 박영호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영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홍성군 고도면(高道面)에 있는 신안서당(新安書堂)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인 1937년 7월 중순 이래, 송길한(宋吉漢)과 여러 차례 공산주의 등 신사상에 대해 토론하였다. 같은 홍성군 고도면 출신의 송길한은 1933년 일본으로 유학해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기 위해 1937년 6월 18일 귀향했으나, 그해 7월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 결국 중국행을 포기하고 홍성에서 동지를 규합해 독립운동을 모색 중이었다. 송길한과 동지적 관계가 된 박영달은 1937년 8월 하순부터 서당의 학생들에게 조선민족 정신의 표징(表徵)인 우리말과 글을 폐지하는 것은 결국 민족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라면서 한글을 가르치고 창가(唱歌) 등을 통해 이를 보급하였다. 또한 「걸식(乞食)과 쥐새끼(小鼠)」라는 제목의 옛날이야기 등을 통해, 자산가(資産家)나 지주의 횡포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불공평을 설명하고, 무산자(無産者) 해방을 위한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후 같은 마을 한영석(韓永錫)의 집이나 송길한의 집에서 여러 차례 이들과 회합하여 당면한 정세 등에 대해 토의하였다. 한영석이 자신도 중일전쟁에 출정할 것이고 국방헌금(國防獻金)도 필요할 것이라 하자, 송길한이 조선민족에게 국가가 있다면 전쟁에 나갈 필요도 국방헌금을 낼 필요도 없을 것이라며 민족해방을 역설하였다. 또 송길한이 「사(死)의 찬미(讚美)」의 노래가사를 인용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설명하는 등을 통해 한영석도 점차 공감하게 되어, 이들은 함께 동지적 관계를 맺고 함께 단결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해 9월 19일 같은 마을 지창순(池昌順)의 집에서 송길한은 장차 만주(滿洲)로 가서 동지를 규합하고, 박영달과 한영석은 홍성에서 무산아동(無産兒童)의 교육을 통해 아동과 농민층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38년 6월경 송길한 등 6명과 함께 홍성경찰서(洪城警察署)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16일 5명은 기소유예(起訴猶豫) 또는 기소중지(起訴中止)로 석방되고 박영달과 송길한만 예심에 회부되었다. 1년여가 지난 1939년 7월 27일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 홍성지청(洪城支廳) 검사분국(檢事分局)에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0년 칙령(勅令) 제45호에 의거하여 징역 11월 7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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