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元植
1885-12-20 ~ (192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원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박원식은 1919년 3월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월 3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함남 단천의 천도교 지사들은 긴급회의를 열고교조 최제우의 순도기념일(殉道記念日)인 3월 10일을 거사일로 약정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각 면에서 온 3백 명의 신도들이 천도교당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이 시위로 헌병대에 의해 7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하고 142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11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나 헌병대와 군청을 공격하여 유혈 충돌이 빚어졌다. 단천군민 500여 명은 22일에 다시 헌병대를 공격하였다. 군중은 동포에게 총질한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고 투석을 시작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또 군중을 향하여 총질을 하였다. 이 총격으로 8명의 군중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성호를 비롯하여 황희청(黃熙靑)·송문일(宋文一)·이종근(李宗根)·황승오(黃承吾) 등 주도 인물들은 함흥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시위 후 체포된 박원식은 1919년 5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소요 등으로 징역 8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8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는 다시 상고하였으나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3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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