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二基
1914-08-30 ~ (1950-06-30)·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貳基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이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0년 6월 6일 삼천포소년회 임시집행위원회에서 6월 15일에 개최할 제4회 정기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출됐다. 1931년 4월경 이후 공산주의 이론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삼천포청년동맹 회관을 출입하며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여러 권 구입해 읽었다. 이후 공산주의에 기반한 삼천포독서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4월경 스승이자 삼천포농민조합(三千浦農民組合) 간부인 박대갑(朴大甲)에게서 “공산주의 운동자 스스로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이 되어 이들의 일상생활을 토대로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며 노동자 및 농민 운동의 질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지도를 받았다. 박이기는 이에 공감하고 7월경 삼천포 부두에서 하역 인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1934년 3월 하순경 손영섭(孫泳燮), 박인욱(朴仁煜)과 함께 삼천포 읍내에서 만나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조직 준비를 위한 단체로 삼천포노농운동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운동방침을 세우고 각각의 활동영역을 정했다. 이에 따라 박이기는 읍내 일원에서 노동운동을 하기로 하고 손영섭은 읍내 궁지리(宮旨里), 이홀리에서 농민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4월 15일경 읍내 동림리(東林里) 도로 공사장에서 박영국(朴暎國)을 만나 공산주의 이론과 사회운동 지도 등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34년 6월 손영섭의 소개로 정종주(鄭瑽柱)를 만나 농민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의해 동지로 포섭하고 실행방법에 대해 협의했다. 한편 손영섭, 박인욱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서로의 활동 상황을 보고하고 격려했다. 동시에 8월 상순에는 비밀결사 농민운동그룹을 조직했다. 같은 해 11월 중순에는 부두에서 일용직 노동자 신세철(申世徹)과 만나 3~4회에 걸쳐 노동자 단결과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주장했다. 이어 1935년 5월 하순경 박대홍의 집에서 이금복(李今福)을 만나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부인부문을 책임져 줄 것을 의뢰해 승낙을 받았다. 박이기는 삼천포소년회 활동을 하다가 1931년 8월 5일 박대홍(朴大鴻) 등 6명과 함께 체포됐다. 1931년 10월 21일 이홀리(耳笏里)에서 열린 삼천포농민조합 정기대회에서 이른바 ‘불온한 언사(言辭)’가 있었다는 혐의로 삼천포지역 청소년 동지 11명과 함께 체포됐다. 이후에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매진하다 체포됐다. 1939년 8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진주형무소(晉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2년 3월 4일 출옥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