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利鳳
(1855) ~ 미상·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이봉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 수안(遂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황해도 수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일, 곡산(谷山)의 천도교인인 이경섭(李景燮)이 수안읍 천도교구장인 안봉하(安鳳河)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날 안봉하는 김영만(金永萬)·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 등 천도교 관계자들과 회합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2일, 천도교 시일집회(侍日集會 ; 일요일집회)를 이용하여 위의 인사를 비롯한 김동선(金洞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龍一)·장성도(張聖道)·안창식(安昌植)·홍길재(洪吉載)·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이응호(李應浩) 등이 교구실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이 비밀회의에서 3월 3일에 군내 각 면의 천도교인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헌병의 퇴거를 요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만세시위의 연락·준비·진행을 담당한 한청일과 홍석정은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대천(大千)·오동(梧洞)·연암(延岩)·공포(公浦) 등 각 면의 신도들에게 연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운동 계획을 미리 눈치챈 헌병대에 의해 안봉하·김영만·나찬홍 등 대부분의 주동급 인사들이 붙잡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주동급 인사가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한청일·홍석정·이영철을 중심으로 수안의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3월 3일 새벽 6시 읍내 천도교 교구실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리고 헌병분대로 가서 퇴거를 요구하였다. 또 오전 11시에는 각 면으로부터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계속 몰려들어, 다시 헌병분대로 몰려가 헌병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일본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오후 1시경 시위군중은 다시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박이봉도 여기에 참가하여 헌병분대 앞에서 헌병분대의 인도를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박이봉은 1920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2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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