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益燦
1873-01-15 ~ 1942-10-0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익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덕군 낙평동(洛坪洞) 교회 조사인 강우근이 서울의 만세소식을 기독교측의 인사들에게 전달하면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영해의 만세운동계획은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은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박익찬은 이같은 거사 계획을 접하고 적극 참가하였으며, 3월 18일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시위군중들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일경들을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따라 부를 것을 주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후 장터로 돌아가 계속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가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경을 구타하였다. 이어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고 영덕경찰서에서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였는데, 박익찬은 격분한 사위군중과 함께 그들을 추적 포위하여 구타 응징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이튿날까지 계속되어 대구(大邱) 보병 80연대 병력 17명의 지원을 받은 일경과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7월 11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공문서 훼기·보안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8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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