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在淳
1884-10-24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재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박재순은 1919년 3월 함북 명천군(明川郡) 하가면(下加面)에서 독립만세운동 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명천군의 독립만세운동은 길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길주에서 시위가 일어 났다는 소식은 곧장 하가면 일대에 전해졌다. 3월 14일 오전 11시, 화대동(花臺 洞) 거리에는 집집에서 쏟아져 나온 5,000여명의 군중이 물결쳤다. 시위 군중의 발길은 저절로 그들의 원한이 맺힌 화대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화대헌병대의 발포로 시위 군중 5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니, 이는 함경북도에서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희생된 최대 숫자이다. 다음날인 15일, 화대장터에 모인 대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하가면사무소로 향 하였다. 이들은 그동안 일제 앞잡이가 되어 면민들을 괴롭혔던 면장 동필한(董 弼漢)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의 대열에 참가하여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그러나 동필한은 "나는 조선 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 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버티었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면 장에게 침을 뱉고 구타를 가했다. 면장은 헌병의 도움으로 헌병분견소에 몸을 피하였다. 군중들은 면사무소로부터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 하는 한편, 면장을 내 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때 헌병들이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민수(董敏秀) 외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남 자 9명 여자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월 15일의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현 장에서 체포되었거나 그날 밤부터 시작된 대검거에서 모조리 잡혔다.시위 후 체포된 박재순은 1919년 7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보안 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벌금 30원, 노역기간 30일을 받고 공소하여 8월 22일 경 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3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