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貞贊
1891-12-09 ~ 1973-05-05·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貞燦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정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평원(平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6일 평원군 한천시장(漢川市場)에서 최한신(崔漢信)·계재곤(桂在坤)·서형묵(徐亨默) 등과 함께 군중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펴다가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한 그는 고향에서 한천청년단(漢川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후 청년단은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특파된 김석황(金錫璜)·임승업(林承業) 등을 영입하여 의용단(義勇團)의 국내 지부로 조직을 개편하였는데 그는 동단의 군무대리(軍務代理)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20년 6월 한천면(漢川面)의 자산가 최윤복(崔允福)으로부터 거액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자금 모연에 힘썼으며 의용단원들의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폭파의거를 도왔다. 그러던 중 1920년 9월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로를 치렀다. 그후 그는 1926년 6월 조창준(趙昌俊)·김문수(金文洙)·허상옥(許相玉)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28년 3월에는 함북 웅기(雄基) 기독교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국가의 흥망(興亡)은 단결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붙잡혀 1개월간의 고초를 겪었다. 1944년 11월에는 백기환(白基煥)·정찬조(鄭燦朝) 등과 함께 일본 군사시설과 신사(神社)에 방화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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