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鍾恩
(1886)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종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박종은은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다녔다. 그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에 소재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3월 1일 저녁 숭덕학교(崇德學校) 근처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만세운동 ‘축하연설회’를 열었으며, 100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조선 독립의 연유(緣由)」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3월 2일 교회 인사 조익준(趙翊俊)에게서 이튿날 평양에서 축화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사실을 다른 교인들에게 전달했다. 3일 150명의 신도와 함께 평양에 갔다. 그는 평양 보통교(普通橋)에 모인 2,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렸다. 일본 군경들은 무력 진압에 나섰다. 박종은은 3월 7일 중국 펑톈(奉天)으로 갔다. 3개월 후 국내에 돌아온 그는 9월 1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몸담았다. 그는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총무부장을 맡았다. 대한국민회는 박승명(朴承明)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이 되어 ‘한국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대한국민회는 평양에 본부(本府)를 두고 각 군(郡)에는 군회(郡會), 각 면(面)에는 향촌회(鄕村會) 등의 하부조직을 설치했다. 박종은이 활동했던 독립청년단 역시 그 산하 조직이었다. 10월 9일 상하이(上海)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평남대의원(平南代議員)으로 활동하고 있던 김홍서(金弘敍)에게서 ‘1920년 봄 미국에서 개최하는 국제연맹 회의’ 관련 문서를 건네받았다. 그는 대한독립청년단 총무부장 자격으로 각지를 돌면서 한국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1월 13일 새벽 평양경찰서(平壤警察署) 소속 경찰들은 박종은의 집을 수색했다. 상하이에서 온 인쇄물을 보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간 그는 취조 후 풀려났다. 일본 경찰은 평양의 대한국민회 실체를 포착했다. 평안남도경찰부(平安南道警察部) 소속 경찰들은 관련자 색출 및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박종은은 12월 4~5일경 교회당에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초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공소(控所)를 제기했지만 3월 25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서 기각되었다. 그는 불복해 즉시 상고(上告)를 제기했다. 하지만 4월 22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다시 기각했다.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9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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