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宗柱
1898-02-2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종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음력 10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21년 음력 5월 무렵 의군부 단장 이범윤(李範允)이 연해주 십여창(十餘倉) 지역에 설립한 사관학교에 입교해 군사교육을 받고 경계 근무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922년 음력 1월 혈성단에 가입하여 강국모(姜國模) 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고려혁명군에 소속되어 1922년 4월 25일 러시아 연해주 강하치(江河峙)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1922년 6월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조경철(趙京哲)·차정호(車正浩)와 논의 끝에 북간도로 이동해 무장투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922년 음력 9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으로 이동하고, 1923년 4월 사립동양학원(私立東洋學院)에 입학하였다. 이때 사립동양학원 교사였던 방한민(方漢旻)은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조선혁명단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선전물을 배포할 선전부와 암살·파괴 등의 임무를 담당할 군사부를 설치하였다. 동년 6월 차정호로터 방한민의 계획을 듣고 이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8월 12~13일에 연길현 국자가 두도구(頭道溝)에서 철도 개통식이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개통식에 맞춰 일본영사관과 공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주요 관원을 암살하며 선전문을 살포하기로 계획했다. 1923년 7월 4일 이러한 활동을 포착한 일제 경찰에 의해 방한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24일 청진지방법원(淸津地方法院)에서 이른바 ‘강도’ 등을 이유로 징역 8년을 받았다. 1927년 징역 4년 6월 10일로 변경되었다.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8년 4월 20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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