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昌先
1888-07-13 ~ 1959-03-2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昌甫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창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용담(龍潭) 사람이다. 1909년 문태수(文泰洙 : 文泰瑞)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의 사태가 도래하자 박창선은 1909년 경 문태수(文泰洙) 의병부대의 참가하여 전북 장수(長水)·용담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문태수는 대한제국군의 하사출신으로 경남 안의(安義) 사람이나 을사조약에 반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뜻을 세워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하였다. 이후 문태수 의병부대는 장수 ·무주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서울진공작전때에도 참가하였다. 이후 문태수 의병부대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 등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을 다수 사살하였다. 박창선은 이와 같은 문태수의진에 소속되어 1909년 5월 장수군 계북면(溪北面) 덕유산(德裕山) 일대에서 군수금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의병항쟁 중 일본군에 붙잡혀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폭동으로 태(笞) 100도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0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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