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處厚
(1883)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시엣치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처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883년 평안남도(平安南道) 순천군(順天郡)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2월 13일 하와이로 이주하여 카우아이섬에서 노동을 하다가, 얼마 후 북미로 갔다. 1908년 7월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서 커니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커니 대표 박처후는 링컨 대표 이종철, 오마하 대표 김사형과 함께 여름방학 동안 한인 청년들을 모아 체조와 군사훈련을 시키자는 의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1909년 6월 박용만과 함께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있는 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했다. 박처후는 『신한민보』 1910년 9월 22일자에 「오인(吾人)의 급선무는 재숭무(在崇武)」라는 글에서, 무력을 양성하여 일제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0년 4월 1일 헤이스팅스대학에서 한인 학생들을 위한 모든 시설을 제공함에 따라 한인소년병학교가 헤이스팅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1913년 6월 16일 한인소년병학교가 개강하였는데, 네브라스카주 커니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처후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후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를 맡아 한인 청년들에게 영어 문법과 작문을 가르쳤다. 한인소년병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소년병학교 후원을 위해 1915년 1월 자본금 1만 달러의 한인농업주식회사를 발기했다. 이후 수학 전공으로 커니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1916년 네브라스카대학에서 영어 전공으로 졸업하였다. 1916년 11월 웰치 감리교 감리사의 통역 겸 조수로 귀국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미국적십자사와 교류하면서 대한적십자회 대표로 활동하였다. 미국적십자회의 도움을 받아 대한적십자회 간호부 양성 교육을 담당하면서 대한국민의회의 외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3월 간도에서 온 박영빈을 주선하여 군총 300정 구입을 계약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무기 구입을 지원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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