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致道
(1884) ~ (1926)·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成浩, 朴星浩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치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분개하여 경북 영덕에서 평민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의병진에 참가하여 3년 동안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나라가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안도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에 들어가 대한제국군인 및 의병들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9월 박치도는 안도현에서 조동식(曺東植)·최재용(崔載容)·엄홍구(嚴弘龜) 등과 함께 군자금과 곡식 등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0월 23일 상해 임시정부의 권고로 대한정의단이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로 개칭되자, 이에 동조 이 단체에서 소모과장으로서 소모과 서기 박장석(朴長石)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당시 그와 함께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을 보면, 총재 이규(李圭), 부총재 강희(姜熹), 비서과장 겸 통신과장 홍우찬(洪祐贊), 서무과장 겸 회계과장 강두희(康斗熙), 외교과장 길성익(吉星翼), 편집과장 윤석우(尹錫禹), 사령관 이동주(李東柱), 검사과장 김정식(金鼎植), 심판과장 연병준(延秉俊), 교련교관 원덕주(元德柱)·오 일(吳一)·이만진(李晩晉), 참모부장 이동주(겸임), 군무부장 강익성(姜翼成), 경위부장 김병순(金炳淳), 경리부장 강이중(姜以中), 준비과장 박윤희(朴允熙), 공장과장 조병규(趙炳奎), 측량과장 윤석우(겸임), 사찰과장 석광옥(石光玉), 순찰과장 강도준(姜道俊), 출남과장 김도원(金道源), 모연과장 강호련(姜浩連), 교련과장 조동식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세밀한 조직을 가진 대한정의군정사는 부근지역에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및 황용기(黃龍起)·이규철(李揆哲) 등의 동맹결사대 등 다른 무장독립운동단체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적측의 삼엄한 경비를 돌파하고 함경남도의 갑산(甲山)·삼수(三水)지방 및 함경북도의 무산(茂山) 지방으로 진격을 시도하여 적의 헌병대, 경찰관서 및 관공서를 습격 분쇄하기도 하였다. 특히 소모과장으로 일하던 박치도는 독립군의 모집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한편 박치도는 독립군의 양성을 위하여 박동일(朴東一)·계성춘(桂成春) 등 10여 명을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에 파견하였다. 그 후 응원단(應援團)을 조직하고 많은 무기를 구입하여 실력을 배양하던 중 1922년경 무기를 군정서에 인계하는 동시에 헌병대장에 취임하였다. 1923년 박세진(朴世鎭)·유기동(柳基東)·김만수(金萬秀) 등과 함께 북만 취원창(聚源昶)으로 집단 이주하여 활동하다가, 1924년 4월 6일 유기동 등과 함께 하얼빈 총영사관의 순사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를 처단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유기동·김만수·최모 씨 등이 전사하자, 1926년 취원창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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