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致良
(1878)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崔鎬璟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치양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8년 음력 3월부터 1909년 음력 4월까지 충북 보은군(報恩郡)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공주감옥(公州監獄) 청주분감(淸州分監)에 구류 중 1909년 8월 탈출하여 같은 해 음력 9~11월경 충북 청산(靑山)ㆍ보은군 일대에서 조운식의진(趙雲植義陣)의 참모(參謀)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조운식은 1909년 음력 7월 한봉서(韓奉西)ㆍ박황성(朴瑝成)ㆍ이인만(李仁萬)ㆍ김용태(金龍泰) 등과 함께 경북 풍기(豊基)에서 기의(起義)하였다. 충북 보은ㆍ청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북 상주군(尙州郡) 화북면(化北面)에서 밀정 정화춘(鄭化春)ㆍ김경모(金京模) 등을 처단하였다. 그 후 1909년 10월 13일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이범진(李範晋)으로부터 러시아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제의를 받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박치양은 1909년 감옥을 탈출한 뒤 조운식의진의 참모가 되어, 부장 박성한(朴成漢)ㆍ한봉서 등 부하 300명을 이끌고 경북 상주ㆍ풍기, 충북 보은ㆍ청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9년 12월 27일 의병장 조운식 등과 함께 보은 속리산에 주둔하던 중 영동경찰서 순사대에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14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내란(內亂) 및 파옥탈주죄(破獄脫走罪)로 종신유형(終身流刑)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10년 3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고 종신형을 받았다. 1912년 징역 12년, 1914년 징역 9년, 1915년 징역 7년 3월 20일로 감형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4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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