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判同
(188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판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8년 11월부터 1909년 8월까지 전북 고부(古阜)ㆍ부안군(扶安郡)에서 김익삼의진(金益三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의병장 김익삼은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이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같은 해 9월에 전남 장성(長城)에서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이 주도하였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참여하여 무기와 식량의 조달을 책임졌다. 1907년 9월 3일 고창(高敞) 문수산(文殊山) 전투에 참가하고, 12월 10일 흥덕(興德) 길마전 전투에 김용구(金容球)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무동촌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같은 해 12월 27일 호남 창의군이 적에게 패하여 기삼연이 체포된 뒤, 스스로 독립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박판동은 1908년 11월 20일 김익삼 등 의병 7명과 함께 총 2정을 휴대하고 전북 부안군 돌갈촌(乭葛村),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부안군 진평리(平眞里), 1909년 8월 7일에는 전북 고부군 답내면(畓內面) 장춘리(長春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2년 9월 13일 징역 3년 6월로 감형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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