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弘錫
(1857) ~ (1909)·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홍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서울 사람이다. 길찬범(吉贊範)·안흥관(安興寬) 의진에 참여하여 충남 직산(稷山)과 서울에서 활약하였다.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그것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박홍석은 이같은 시기인 1907년 길찬범 의진에 가담하여 같은 해 8월 14일 장원겸(張元謙) 등 수십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충남 직산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총기 1정을 노획하였다. 이후 연창수(延昌洙)와 함께 안흥관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가입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12월 5일 안흥관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100여 명과 같이 서울 뚝섬의 순사파출소를 기습하여 총기·군도 등의 무기와 군수품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출운용태랑(出雲龍太郞)과 횡전상사랑(橫田常四郞)을 처단하는 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1909년 5월 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7월 13일 대심원(大審院)에서 기각, 형이 확정됨에 따라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