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弘洙
미상 ~ 1921-03-03·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홍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1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19년 11월 조선총독부는 중국·조선의 국경 밖에 있는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마적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에서는 만주 장춘(長春) 일동사(一東社) 지사장 중야천락(中野天樂)에게 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중야천락은 당시 길림성(吉林省) 몽강현(蒙江縣)에 있는 마적 장강호(長江好)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이에 마적 장강호는 이를 승낙하였다. 중야와 장강호 두 사람은 1920년 7월 초,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 사무관 산구(山口) 고등과장과 환산학길(丸山鶴吉) 참사관과 독립군 토벌에 대하여 논의하고 산구 고등과장의 협조 하에 서울에 있는 총포점으로부터 소총탄 2천여 발 및 권총 등을 구입하고 또 독가스용 재료를 약방 천우당(天祐堂)으로부터 구입하였다. 그리고 1920년 9월 하순, 몽강현으로 돌아왔다. 이에 장강호는 1919년 10월 하순 부하 1400명 중 정예 요원 500여 명을 선발하고 잔여의 부대는 몽강현에 머무르게 하여 대기하게 하였다. 중야와 장강호는 선발한 1대의 직접 지휘를 담당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몽강현 청강강(靑江崗)을 출발하여 안도현(安圖縣)으로 향하였다.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한 장강호 마적단은 중야와 함께 서간도 지역을 무대로 한 본격적인 독립군 근거지 습격 및 한국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들은 1920년 10월 하순 안도현 유두산(乳頭山)의 한국인 독립운동 부락을 습격하면서부터 만행을 시작하였다. 이후 장강호 마적은 중국 국경지역 한국인 마을인 장백현의 22도구(道溝)·23도구(道溝) 등을 차례로 습격하여 조선인 가옥 수 호를 소각하고 십수 명을 총살 또는 교살하였다. 그리고 동월 하순 한국인 약 30호와 중국인 약 3호로 되어 있는 21도구 강안에 있는 부락과 항일학교인 정몽(征蒙)학교를 습격하여 학교·민가 등을 소각하고 독립운동가 27명을 독가스로 살육하였다. 이어서 20도구·19도구에 이르러 독립운동가 가옥 수 호를 소각하고 동지방에서 독립운동단체 단장 최진국(崔鎭國) 이하 17명을 체포하여 24도구로 데리고 가서 이를 감금하였다. 그리고 그 후 최진국과 그의 부하 구장 2명을 총살하고, 이어서 24도구에서 최진국의 부하 14명을 총살하였다. 이들 장강호 마적단에는 일본군이 마적으로 위장하고 한인들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들은 장백현 포태산(胞胎山)을 근거로 하였으며, 그 중 저명한 자는 평원(平原)·천구(川口) 등이었다. 이들은 한인들을 다수 참살하였는데, 8도구에서는 8인을 참살하였고, 13도구에서는 박덕훈(朴德勳)·한도윤(韓道允) 등을, 계양포(桂陽浦)에서는 박춘호(朴春浩)를 각각 사살하였다. 한편 1921년 3월 3일 밤에 장백현 천평(泉坪)에서 민가 5호를 불사르고 독립운동 혐의로 김우정(金禹貞)·김치삼(金致三)·노한석(魯漢石)·김씨 성을 가진 2명을 학살 할 때, 박홍수 역시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