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華英
(1915) ~ 1941-03-13·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朴花榮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화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4년 4월 일본 경도(京都) 소재의 좌하고등학교(佐賀高等學校)에 입학하여 선배 이유호(李有浩) 등으로부터 혁신주의(革新主義) 민족이론을 계몽받아 한국을 일본의 속박으로부터 독립시켜 민족해방을 실현하려면 혁신주의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에 대한 민족의식 고양과 혁신주의 사상의 선전 계몽을 담당할 조직체 결성을 당면 과제로 삼은 그는 1936년 4월 좌하고등학교 재학생 문재수(文在洙) 등 7명을 차례로 동지로 규합하고 선배 이유호의 지도 아래 혁신주의 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1939년 4월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공학부에 입학하여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내의 '좌하고등학교 집단'과 연락을 취하며 그들과 비밀 협의를 갖고 '한국민족 해방을 위하여 희생함은 인텔리의 사명임, 혁신주의 이론 파악에 정진할 것, 재일 한인을 대상으로 혁신주의적 계몽에 앞장 설 것, 한글과 한국문화 유지에 노력할 것, 재경도조선인학생학우회(在京都朝鮮人學生學友會)를 지도할 것, 동지 규합에 노력할 것' 등을 협의·결정하였다. 이후 동 회원들과 십여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연구활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40년 10월 이를 눈치챈 일경에 의해 동지들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히자 은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1년 3월 9일 일경에 붙잡힌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던 끝에 4일 만인 3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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