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羲洛
1882-11-14 ~ 1967-01-16·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박희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知品面洛坪洞)교회 조사(助事)로 있던 김세영(金世榮)이 유학 차 평양(平壤)으로 가던 도중 서울에 들러 국내외의 정세를 전해듣고, 마침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즉시 귀향하여, 3월 12일 구세군 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계획되었다. 한편 그는 3월 15일 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 등을 만나, 그들에게 김세영으로부터 전해들은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그들의 호응을 얻어 거사 계획을 진행시켰다. 한편 그는 병곡면 송천동(柄谷面松川洞) 권유동(權有東)의 집에서 권태원을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권태원·정규하 등과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웠는데, 정규하의 제의로 3월 18일의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 5대 성씨인 권(權)·남(南)·박(朴)·이(李)·백(白) 씨를 중심으로, 영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 일대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분담·진행하였다. 그는 3월 18일 오후 1시경,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정규하·남효직·남여명 등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도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그는 정규하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연도의 군중이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영해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平海)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5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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