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四兼
1881 ~ 1955-12-08·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방사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방사겸은 23세 때인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05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장경이 결성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에 참여하였다. 회원모집을 위한 순찰위원으로 미국 각지를 순행하면서 미주 한인들의 교육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동교육회는 1907년 정치적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조직을 확대 발전시켰다. 이때 방사겸은 새크라멘토에서 회원을 확보하고 지방회를 설립하였으며, 프레즈노와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가 친일외교관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주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립협회와 방사겸이 관여하고 있는 대동보국회가 합동해야만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이때 방사겸은 '양 의사의 대사건을 순로조이 치러 나가자면 두 회가 합하는 것이 옳다고'하면서 두 단체의 합동을 적극 찬성하였다. 1909년 2월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합동하여 '국민회(國民會)'가 되었고, 1910년 '국민회'는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었다. 방사겸은 그후 미국 시카고 등지에서 1923년 한국독립연구회(韓國獨立硏究會)를 창립하여 간사로 활동하였고, 1931년과 1944년 이후로 신한민보와 북미시보에 여러 차례 사설을 게재하여 재미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방사겸은 별세하기 3년 전에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여 순한글로 적은 평생일기 7권을 남겼다. 평생일기에는 한국인의 미주 이민과 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1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서로 독립적인 자료 두 곳 이상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공식자료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발견-검증 파이프라인: 한국어 위키백과 「방사겸」에서 발견 후 검증
출처 확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