裵容奭
1890-11-17 ~ 1938-11-2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배용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에서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안평면(安平面) 괴산교회 김원휘(金原輝) 조사(助事)와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괴산교회 박우완이 쌍계교회(雙溪敎會) 목사 박영화(朴永和)에게 만세운동을 제의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들은 쌍계교회 교인 박영신(朴永信)·배달근(裵達根) 등을 참가시키면서 논의를 거듭한 후,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도근(裵道根)·이일만(李一萬)·김명출(金明出)·박세길(朴世吉) 등을 새로운 동지로 규합하고, 태극기 200여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일 하루전인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오후 1시경,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대기한 군중들은 박영화·박영신ㆍ배중엽 등이 나누어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50여 명의 학생들을 비롯한 2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네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쯤 비안주재소에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박영화를 비롯한 주동자 5명이 검거되었으며,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 후 관련자 다수가 붙잡혀 1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배용석도 3월 12일 박영화ㆍ박영신ㆍ박영달 등이 주도한 쌍계시위에 참가하여 동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동네를 행진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19년 11월 15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2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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