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鳳根
1897-04-10 ~ 1936-01-2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백봉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부터 6일까지 전개된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울산 병영에서는 청년회 간부인 양석룡(楊錫龍)과 이현우(李鉉禹)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 규합과 준비에 착수하여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4월 3일 서리(西里)의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이튿날의 거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들이 주축을 이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보통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인근의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3시경, 군중들은 다시 병영보통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행진하면서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군중은 1천여 명에 이르렀고,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 받아 시위군중과 공방전을 벌였다. 4월 6일에는 병영청년회 간부들과 백봉근·윤학이(尹學伊)·김송근(金松根) 등의 합동 계획으로 전날보다 더 큰 기세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다. 이때 백봉근도 일본 군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2일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2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